나이 들면 머리 굳는다? 아니, 뇌는 변화한다 -가소성

기사원문 링크

2016년 8월의 기사다. 그새 뇌과학은 또다른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밝혀냈겠지만… 희망적인 몇몇 포인트를 정리해 둔다. (‘Use it or Lose it’이 희망의 메시지인가, 절망의 메시지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일단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희망 or 절망은 해석, 다짐의 영역이기도 하다.

가소성은 양날의 칼이다. 학습한 결과(가소성의 성과)를 기억하고 사용하려면 뇌 회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가소성은 필연적으로 안정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빨리 학습하는 극도로 유연한 뇌는 아무것도 오래 기억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뇌가 된다. 인공신경망에서 학습률(learning rate)를 높게 설정해두면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학습률이 높은 인공신경망은 최근에 입력된 자료의 영향을 너무 크게 받은 나머지, 이전에 학습한 것들은 죄다 잊어버린다. 세심하게 안배된 뇌의 발달 단계를 보노라면, 다 살라고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 동안에 이미 만들어진 회로가 바뀌기도 한다. 결정적 시기란, 발달 단계에서 특정한 능력을 습득하기에 대단히 중요한 시기를 뜻한다. 예컨대 언어의 결정적 시기 동안, 뇌는 언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언어에 관련된 뇌 회로의 가소성이 증가해서 언어 습득에 유리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면 언어에 관련된 뇌 회로들이 안정화되면서 언어 습득이 어려워진다. 과거에는 결정적 시기가 끝나면 뇌 회로를 더이상 바꿀 수 없다고 여겼다. 해당 뇌 부위의 가소성은 결정적 시기가 끝남과 함께 끝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시기가 지난 뒤에도 경험에 따라 뇌 회로가 바뀌는 사례들이 보고되면서 이런 생각이 변하고 있다. 이미 닫힌 결정적 시기를 재개하는 방법을 찾는 연구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요즘에는 결정적 시기라는 강한 표현 대신에 민감한 시기(sensitive period)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뇌에서 구조와 동작은 분리하기 어렵다. 뇌의 활동은 구조적인 변화를 동반하며, 구조의 변화는 동작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니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거나 경험과 연습을 통해 뇌의 작동 방식이 변하면 구조도 함께 변한다.

‘뇌 가소성’의 원리들은 변화의 방향을 주도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준다. 사용하지 않는 시냅스들을 없애는 과정인 시냅스 가치치기에서 알 수 있듯, 뇌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부분은 약해진다(“Use it or Lose it”). 반면에 연습은 뇌의 구조를 바꾸어 점점 더 능숙해지도록 만든다. 우리는 앞에서 2시간의 자동차 게임 전후의 뇌와, 런던 택시 운전기사의 뇌를 통해 연습이 실제로 뇌의 구조를 바꾼다는 것을 확인했다.

Homo Underliner: 최명길 평전

조선시대 왕의 사과문

*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한다. 같은 해 2월 19일, 민심의 동요가 심상치 않자, 인조는 백성들에게 아래의 사과문을 발표한다.

“덕이 부족한 내가 대위에 있은 지 이제 15년이 되었다. 운명이 험한 데다 국사에 어려움이 많아 잇따라 변고를 당해 두 번이나 파천했으니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이 이미 적지 않은데, 하늘이 바야흐로 재앙을 내림에도 과거의 간난을 반성하지 못했다.
돌아보건대 내가 깊이 통탄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백성을 기르는 직책에 있으면서 스스로 도를 잃어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만백성들에게 화를 끼쳤다. 난을 구하러 달려온 군사들을 전쟁터의 원혼이 되게 했고, 무고한 백성들을 모두 이역의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지 못해 곳곳에서 가슴을 치며 하늘에 호소하게 했으니, 백성의 부모 된 자로서 장차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는 듯하여 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제 묵은 폐단을 통렬히 징계하고 가혹한 정치를 모두 없애며, 사사로운 당파를 제거하여 공도를 회복하고, 농사에 힘쓰고 병졸들을 쉬게 하여 남은 백성을 보전하려 한다. 아, 너희 팔도의 사민과 진신대부들은 나의 부득이했던 사연을 양해하고 이미 지나간 잘못 때문에 나를 버리지 마라. 상하가 합심하여 어려움을 널리 구제함으로써 천명이 계속 이어져 우리 태조와 태종이 남기신 유업을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라.”
한명기, <최명길 평전>

서울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가이드라인 프로젝트(2014)를 진행할 때 (지방)정부의 사과문이 포함해야 할 요소에 대해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대략 이런 내용들이었다.


– Care/Concern; 피해를 입은 시민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
– Action;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취할 조치
– Perspective; 위기에 대한 해석/전망

인조의 사과문은 2014년에 작성된 가이드라인을 충족하는 제대로 된 사과문이다. 300년 이상의 시간적 격차와 군주제와 공화제라는 정체(政體, regime) 차이를 고려한다면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사과문이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당시의 백성들에게 위안이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시인 김소연은 <마음사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처참함은 너덜너덜해진 남루함이며 처절함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괴로움이며 처연함은 그 두가지를 받아들이고 승인했을 때의 상태다. 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처참함 때문에 우리는 죽고 싶지만, 처절함 때문에 이 악물고 살고 싶어진다. 처연함은 삶과 죽음이 오버랩되어서 죽음처럼 살고 삶처럼 죽게한다.”

처참과 처절과 처연이 중첩된 1637년의 조선 백성들에게 인조의 사과문은 무슨 의미였을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명기 교수의 <병자호란>과 이번에 새로 나온 <최명길 평전>을 읽어보면 정말이지 끔찍하다. 진짜 ‘헬조선’이다.) 위기 커뮤니케이션을 전문영역의 하나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위기 커뮤니케이션이 디폴트인 세상에 살고 있으니 존재의 이유는 여전하겠지만 그럼에도 개운치 않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색 블루

사람은 참 신기한 존재다.

사람의 모든 지각 활동은 뇌로 귀결되고 뇌는 언어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주변에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에 적당한 이름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왜 ‘파랗다’가 때로는 blue, 때로는 green을 의미하는지… 왜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두 색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주 재밌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러한 ‘인식의 장애’가 단지 색깔에 국한될까 싶다. 인권, 폭력, 혐오, 차별, 페미니즘… 이런 개념도 분명히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의 뇌는 처리할 것이고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파랗다’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새싹과 같이 밝고 선명하게 푸르다’

왜 전통 동양화가들은 하늘에 파란색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동아시아의 ‘청색’이 파란색과 녹색을 모두 의미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화권에서 녹색과 파란색은 같은 계열로 취급된다. 그런데 청색의 일부를 녹색으로, 다른 일부를 파란색으로 구분하는 것은 각각을 다르게 가리키는 이름이 생긴 후부터 가능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파란색일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색을 일상적으로 보는 현대인들이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자연에서 파란색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파란색 꽃은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교배해서 만들어낸 것이고, 6만4000종의 척추동물 중에서 몸에 파란색을 지니고 있는 종은 단 2개에 불과하다.

색과 언어를 연구하는 가이 도이처라는 학자에 따르면 세계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색 이름이 어휘에 등장한 순서는 거의 일정하다고 한다. 흰색과 검은색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그 뒤를 이어서 빨간색이 등장한다. 그 다음에는 거의 예외없이 노란색과 녹색이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파란색이 등장한다. 왜 그럴까?

인류는 자연에서 본 색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 수 있는 색에 이름을 붙였다. 특정 색상, 즉 염료를 꾸준하게 생산 가능해진 후에야 비로소 그 색을 가리키는 이름이 생겼는데, 뒤로 갈수록 만들어내기 힘든 색이었던 것이다. 주요 색상 중에서 자연 속에서 가장 찾기 힘든 파란색은 가장 만들기 힘든 색이었고, 그렇다 보니 어휘에도 가장 늦게 등장했고, 어휘에 등장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파란색을 보면서도 파란색으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Homo Underliner: 정확한 사랑의 실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정확한 사람의 실험]을 읽다가 그가 하는 일(읽기와 쓰기)과 내가 하는 일(인터뷰와 퍼실리테이팅, 컨설팅)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그러하다. 이하의 인용도 역시 그러하다.

좋은 이야기는 어떤 인물에게 성격을 부여하느라 투자한 노력을 대개는 회수한다.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의 원천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은 왜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인간이 행복해지기보다는 불행해지는 데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착잡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천지창조’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문명 속의 불만], 1930, 2장)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나고 결국 썪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저자와 나의 공통 관심사는 유의어, 사이비(나쁜 의미가 아니라 ‘유사하나 같지 않은’은 의미로서) 사이에서 정확한 개념과 명칭, 구조를 찾는 것

사랑이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는 본능, 충동, 욕망과 다른 것이라면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행위의 고유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애도mourning와 우울melancholy은 사랑해오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일단 같다. 그러나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에 쏟았던 에너지(리비도)를 철회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라면(그래서 ‘애도 작업’이나 ‘애도 기간’ 같은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그래서 애도와 달리 우울은 병리적인 현상이며 치료의 대상이 된다). 세부 논증은 생략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우울의 경우 ‘상실’과 ‘자학’이 맺고 있는 이 기묘한 관계는 섬세한 해석의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는 점이다.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다. 빙산의 수면 밑에 있는 것이 나의 ‘본질’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 가능한 영역이 ‘진짜 나’다. 텍스트를 다루는 저자는 ‘형식’이라고 했지만 내 세계에서는 ‘behavior’다.

보통의 개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내용’보다는 ‘형식’쪽을 따져보는 게 옳을 것이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무렵에 아래와 같은 지점에 이르게 되면 결과는 거의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부정확한 사랑의 폐허로 보이겠지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래의 짧은 문장이 요즘 내게 필요한 메시지였던 것 같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항상 회의적(skeptical) 자세를 유지하되 전체적으로는 낙관적 전망으로 삶을 사는 것. 이 모순의 매커니즘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것.

Johnnie Walker with Game of thr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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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다. FMCG에서 이런 시도는 대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아래 링크를 보니 GoT의 팬인 한 개인의 프로젝트가 2017년에 이미 있었던 것 같다.

http://toddschreiberart.com/deadlabel/

팬과 브랜드의 의도하지 않은 비연속적 협업 또는 팬이 만든 seed를 브랜드가 상품화로 연결시킨 사례

 

 

필립모리스, 2018/10/04

정보공개 소송 – 감독기관에 대한 공격 사례

  • 아이코스, 히트스틱 등은 언급하지 않고 사명만(CI도 생략) 노출
  • “건강을 위한 최선은 흡연하지 않는 것이며, 정부의 금연 및 흡연예방 정책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계속 흡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과학, 기술, 혁신에 기초한 더 나은 선택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Coombs의 위기 대응 커뮤니케이션 전략 유형 중 가장 날이 선 ‘Attack the accusers’에 해당

 

경향신문_지면광고_2018-10-04

위력이란 무엇인가

“분노나 폭력이나 강제는 위력이 잘 작동할 때보다는, 위력이 자신의 실패를 절감할 때 나타나는 징후이다.”

“난 곧 깨달았다. 이 선생님들께서 내 논문을 읽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선생이 논문을 채 다 읽지도 않은 채 심사를 하려 드는 것은 학생이 논문을 채 다 쓰지도 않고 심사를 받으려 드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웃는 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한일합병의 순간에도 시간은 유유히 흘렀던 것처럼,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흘렀고, 나는 목례를 하고 걸어 나왔고, 마침내 논문은 심사를 통과하였다.”

“유학 도중의 어느 날, 방문학자로 와 있던 한국의 유명 대학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읽어보고 견해를 말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나는 논문을 읽고 그 논문에 대한 이견을 명랑하게 개진했다. 그런데 내 견해를 들은 그는 다짜고짜 화를 냈다. 화를 내며 반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화를 냈고, 분위기는 창난젓이 되었다. 그는 화를 냈을 뿐 내 의견에 어떤 반론도 하지 않았기에, 내 견해에 대해 화를 낸다기보다는, 논문 찬양극에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해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서 어느 대학원생 하나가 원로교수의 위력에 저항했던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당시 등록금 명세서에 보면 ‘개인 지도비용’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지도교수와 학생 간에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지도를 비용으로 계산하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교정을 걷던 원로교수를 불러 세우고는, 당신이 나한테 개인적으로 지도한 적이 단 1분도 없는데, 왜 이 돈을 받습니까, 라고 따졌던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242030005&code=990100#csidx8aa5fddb65c4c5d95287a9cf42b04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