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Underliner: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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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 Life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진행했던 PEAK15 디자인 연구소의 작업 [하루키의 물건들] by 박혜림 디자이너

p 222
내가 어렸을 때는 사회 자체에 ’발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과 제도가 서로 다투는 듯한 문제도 그 공간에 쭉쭉 흡수되어 그다지 큰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회 전체가 둥글둥글 굴러갔기 때문에 그 동력이 다양한 모순이나 욕구불만을 삼켜 들였습니다. 말을 바꾸자면, 난처할 때 도망칠 수 있는 여지나 틈새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도성장 시대도 끝나고 거품경제 시대도 끝나버린 지금은 그런 피난 공간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큰 흐름에 내 맡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대략적인 해결 방법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큰 흐름에 내 맡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대략적인 해결 방법’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대표적인 영역이 직업과 직장, 밥벌이에 대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하루키는 소설가에 방점을 찍고 쓴 글이겠지만 나는 내 직업을 대입하면서 읽었다. 그렇게 읽어도 대부분 말이 되는 것 같다.

p 28
소설가는 어떤 종류의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속에서 항상 저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서는 죽고 마는 것입니다.

p 27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그런 두뇌의 명석함만으로 일할 수 있는 햇수는-알기 쉽게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지요-기껏해야 십 년 정도입니다. 그 기한을 넘어서면 두뇌의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를 ‘잘 갈린 도끼’로 전환하는게 요구됩니다.

p 16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직업 지속성을 위해 내 면도날은 손도끼, 도끼로 바뀌고 있는가 자문해 보게 된다. (자꾸 곤봉이 생각나네.)

하루키는 소설가라는 직업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Originality 정도로 정의하는 것 같다.

p 88
뇌신경외과 의사 올리버 색스는 『화성의 인류학자』라는 저서에서 오리지널한 창조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창조성에는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강고한 아이덴티티와 개인적인 스타일이 있어서 그것의 재능에 반영되고 녹아들어 개인적인 몸과 형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이란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기존의 견해를 타파하고 상상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갯짓하면서 마음속으로 완전한 세계를 수없이 다시 만들고, 나아가 그것을 항상 비판적인 내적 시선으로 감시하는 것을 말한다.

p 97
특정한 표현자를 ‘오리지널’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이 채워져야 합니다. (1) 다른 표현자와는 명백히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사운드든 문체든 형식이든 색채든)을 갖고 있다. 잠깐 보면(들으면) 그 사람의 표현이라고 (대체적으로)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2) 그 스타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버전 업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 스타일은 성장해간다. 언제까지나 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런 자발적 내재적인 자기 혁신력을 갖고 있다. (3) 그 독자적인 스타일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반화하고 사람들의 정신에 흡수되어 가치판단 기준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 혹은 다음 세대의 표현자의 풍부한 인용원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1)에서 부터 막힌다. 어렵다. 나의 컨설팅에서 나만의 스타일이라고 순식간에 느끼게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문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스타일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라는 反論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으나 半論일 뿐이다. 주어진 과제, 미션에 압도되어 내 스타일이나 색깔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가 진실에 가깝다.

그렇다면 오리지널리티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p 271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멍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할 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 된다는 거야.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건 생각할 것 없어,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서 너를 세상에 이해시키면 돼. 설령 십오 년,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말이야” 물론 나 자신이 즐거우면 그게 결과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는 준열한 자기 상대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지지자를 획득하는 것도 프로로서 필수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만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다음은 ‘나 자신이 즐길 수 있다’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즐겁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 이란 아무리 살아봤자 별로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기분 좋다는 게 뭐가 나빠?-라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고나 할까요.

하루키는 ‘자신이 즐거운 것,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하면서 오리지널리티가 만들어진다고 보는 것 같다. 여기에 한가지 주문이 더 붙는다. 단순 반복이 아니라 매번 온 힘을 다해 모조리 쏟아부을 것.

p 164
사람마다 각자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도 있겠지요. 나 스스로도 과거에 쓴 작품에 대해 결코 만족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이라면 좀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 하고 통감하는 일도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면 여기저기 결점이 눈에 띄어서 뭔가 특별한  필요가 없는 한 내가 쓴 책을 손에 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을 써낸 시점에는 틀림없이 그보다 더 잘 쓰는 건 나로서는 못 했을 것이다, 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그 시점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은 만큼 긴 시간을 쏟아부었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아낌없이 투입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말하자면 총력전을 온 힘을 다해 치른 것입니다. 그러한 ‘모조리 쏟아부었다’는 실감이 지금도 내게 남아 있습니다.

p 111
나는 삼십오 년 동안 계속해서 소설을 써왔지만 영어에서 말하는 라이터스 블록 writer’s block’, 즉 소설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 기간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는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재능이 넘친다는 식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럴 리는 없고요, 실은 매우 단순한 얘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을 때만 ‘자, 써보자’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씁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는 번역(영—> 일본어)을 합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라서 표현 의욕과는 관계없이 거의 일상적으로 할 수 있고 동시에 글쓰기에 아주 좋은 공부가 됩니다.

나는 어떠한가? 모든 프로젝트에 전력투구를 해왔다고 볼 수는 없다. 하루키는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을 때에만 썼고 나는 쉬고 싶은 마음이 줄줄 흘러내릴 때에도 컨설팅을 해야만 했으니까. 업종의 차이도 있겠고 업계에서의 포지션 차이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겠으나 크게 의미를 두지는 말자. 앞으로도 이 부분은 크게 달라질 부분은 아니니까. 위 인용문에서 진짜 의미가 있는 부분은 하루키에게 있어 번역의 의미/역할이다. 다음 비례식에서 x는 무엇인가? ‘하루키 : 번역 = 나 : x’ 내 두번째 작업(직업)영역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진지하게 계속해서 고민, 실험을 해서 결론을 내려야할 부분이다.

서른 살을 앞둔 1978년 도쿄 신주쿠 진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1번 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날린 순간 불현듯 자신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날 밤부터 가게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위 내용은  책날개 부분의 작가 소개 부분이다. p 44에는 더 상세하게 등장한다. 기억나지 않는 하루키의 다른 단행본에서도 본 적이 있는 내용이다.  불현듯 운명적으로 자신의 업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p 46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애착과 스토리, 히스토리를 epiphany하게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잠실구장, LG트윈스 이상훈이 등장하는 1997년 가을의 이야기’ 이런 패러디도 재미는 있겠으나 진짜 내 얘기를 조만간 정리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p 43
그렇게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육체노동을 하고 빚을 갚는 일로 이십 대를 지새웠습니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어지간히 일도 많이 했다,라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필시 보통 사람의 이십 대는 좀 더 즐거웠을 거라고 상상이 되는데, 나에게는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나 ‘청춘의 나날을 즐길’ 여유 같은 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먹고사는 게 힘들어도, 책을 읽는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 함께 나에게는 언제나 변함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 역시 내게는 숙제다. 내게 있어 ‘빼앗기고 싶지 않은 기쁨’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 반환점을 돌고 있는 시점에도 그게 무엇인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 무미건조함 또는 게으름에 마침표를 찍자. 바쁘고 힘들어서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무언가와 바쁘고 힘든 삶을 버티게 해주는 기쁨 사이의 차이는 나의 태도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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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 underlines

  • 원천에 가 닿기 위해서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 것은 쓰레기뿐이다.  – 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 They produced a sound that was fresh, energetic and unmistakably their own. 그들이 창조해낸 사운드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 비틀스에 대한 <뉴욕타임스> 의 기사. 하루키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짧은 정의로서 이 인용문을 활용함.
  • 소설가의 경우, 불펜에 대기 선수 따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연장전 15회가 됐든 18회가 됐든 시합이 결판날 때까지 끝끝내 혼자서 던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자’라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목표’가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일이 이상해질 것 같습니다. 내가 학교에 바라는 것은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의 상상력을 압살하지 말아달라’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Author: Official PEAK15

충분한 가치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마케팅과 브랜딩의 문제로 정상에 서지 못하고 있는 기업고객을 위해 Consulting과 Facilitation Service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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