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객사 대표에게 30분 정도의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가 보내온 생각(전략)에 대한 회신이었다. 그의 전략은 고장난 나침반과 찢어진 지도, 증기선 시대의 항해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지만 선장(고객사 대표)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운에 기댄 낙관주의(어쨌든 세게 방망이를 휘두르면 홈런이 나와요.)와 조급한 행동주의(뭐라도 해야죠. 가만히 있으면 죽는데)가 절묘하게 섞여서 점점 수렁으로, 파멸로 향할 가능성이 다분한 시나리오였다.
30분 동안 강한 어조로 그의 전략을 비판했다. 순간 순간 상대방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불쾌한 표정, 숨소리가 느껴졌다. ‘환자의 목숨이 달린 외과수술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서로가 고통스러웠던 프리젠테이션은 끝났다. 격렬한 반론을 예상했으나 상대방은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렸다.
다행히도 그의 잘못된 전략을 단념시키는데 성공했으나
불행히도 그가 가지고 있던 여린 희망의 싹까지 함께 잘라내 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네.
그대는 위험한 일을 그대의 직업으로 삼았을 뿐.
그건 경멸할 일이 아니야.
그대는 그대의 직업 때문에 파멸하는 것뿐이라네.
내 독서노트에 기록되어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이 대사는 외줄타기를 하던 광대의 주검에게 건네는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주의 경험에 이 텍스트를 대입하면 위험한 직업을 가진 ‘그’는 고객사의 대표가 아니라 나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하고 연결이 될 수 있겠는데- 컨설턴트로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을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면 종종 파국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묵숨이 달린 외과수술’의 논리는 응급수술 상황에서만 맞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쨌든, by the way…
지난주 힘든 외과수술을 마쳤고 ‘환자’의 회복 프로그램은 유능한 후배와 파트너가 하고 있다. 부디 쾌차하셔서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가지고 프로젝트가 종료되기를 빈다. (그래야 직업 때문에 파멸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