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Underliner: 정확한 사랑의 실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 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 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정확한 사람의 실험]을 읽다가 그가 하는 일(읽기와 쓰기)과 내가 하는 일(인터뷰와 퍼실리테이팅, 컨설팅)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그러하다. 이하의 인용도 역시 그러하다.

좋은 이야기는 어떤 인물에게 성격을 부여하느라 투자한 노력을 대개는 회수한다.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의 원천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은 왜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인간이 행복해지기보다는 불행해지는 데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착잡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천지창조’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문명 속의 불만], 1930, 2장)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나고 결국 썪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저자와 나의 공통 관심사는 유의어, 사이비(나쁜 의미가 아니라 ‘유사하나 같지 않은’은 의미로서) 사이에서 정확한 개념과 명칭, 구조를 찾는 것

사랑이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는 본능, 충동, 욕망과 다른 것이라면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행위의 고유한 구조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애도mourning와 우울melancholy은 사랑해오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일단 같다. 그러나 애도가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대상에 쏟았던 에너지(리비도)를 철회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라면(그래서 ‘애도 작업’이나 ‘애도 기간’ 같은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우울은 대상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그 대상과 동일시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그래서 애도와 달리 우울은 병리적인 현상이며 치료의 대상이 된다). 세부 논증은 생략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우울의 경우 ‘상실’과 ‘자학’이 맺고 있는 이 기묘한 관계는 섬세한 해석의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는 점이다.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다. 빙산의 수면 밑에 있는 것이 나의 ‘본질’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 가능한 영역이 ‘진짜 나’다. 텍스트를 다루는 저자는 ‘형식’이라고 했지만 내 세계에서는 ‘behavior’다.

보통의 개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내용’보다는 ‘형식’쪽을 따져보는 게 옳을 것이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무렵에 아래와 같은 지점에 이르게 되면 결과는 거의 좋았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부정확한 사랑의 폐허로 보이겠지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래의 짧은 문장이 요즘 내게 필요한 메시지였던 것 같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항상 회의적(skeptical) 자세를 유지하되 전체적으로는 낙관적 전망으로 삶을 사는 것. 이 모순의 매커니즘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것.

Johnnie Walker with Game of thr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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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다. FMCG에서 이런 시도는 대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아래 링크를 보니 GoT의 팬인 한 개인의 프로젝트가 2017년에 이미 있었던 것 같다.

http://toddschreiberart.com/deadlabel/

팬과 브랜드의 의도하지 않은 비연속적 협업 또는 팬이 만든 seed를 브랜드가 상품화로 연결시킨 사례

 

 

필립모리스, 2018/10/04

정보공개 소송 – 감독기관에 대한 공격 사례

  • 아이코스, 히트스틱 등은 언급하지 않고 사명만(CI도 생략) 노출
  • “건강을 위한 최선은 흡연하지 않는 것이며, 정부의 금연 및 흡연예방 정책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계속 흡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과학, 기술, 혁신에 기초한 더 나은 선택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

Coombs의 위기 대응 커뮤니케이션 전략 유형 중 가장 날이 선 ‘Attack the accusers’에 해당

 

경향신문_지면광고_2018-10-04

위력이란 무엇인가

“분노나 폭력이나 강제는 위력이 잘 작동할 때보다는, 위력이 자신의 실패를 절감할 때 나타나는 징후이다.”

“난 곧 깨달았다. 이 선생님들께서 내 논문을 읽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선생이 논문을 채 다 읽지도 않은 채 심사를 하려 드는 것은 학생이 논문을 채 다 쓰지도 않고 심사를 받으려 드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웃는 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한일합병의 순간에도 시간은 유유히 흘렀던 것처럼,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흘렀고, 나는 목례를 하고 걸어 나왔고, 마침내 논문은 심사를 통과하였다.”

“유학 도중의 어느 날, 방문학자로 와 있던 한국의 유명 대학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읽어보고 견해를 말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나는 논문을 읽고 그 논문에 대한 이견을 명랑하게 개진했다. 그런데 내 견해를 들은 그는 다짜고짜 화를 냈다. 화를 내며 반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화를 냈고, 분위기는 창난젓이 되었다. 그는 화를 냈을 뿐 내 의견에 어떤 반론도 하지 않았기에, 내 견해에 대해 화를 낸다기보다는, 논문 찬양극에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해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서 어느 대학원생 하나가 원로교수의 위력에 저항했던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당시 등록금 명세서에 보면 ‘개인 지도비용’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지도교수와 학생 간에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지도를 비용으로 계산하는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교정을 걷던 원로교수를 불러 세우고는, 당신이 나한테 개인적으로 지도한 적이 단 1분도 없는데, 왜 이 돈을 받습니까, 라고 따졌던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242030005&code=990100#csidx8aa5fddb65c4c5d95287a9cf42b0473

Homo Underliner: 평균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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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라는 부제를 달고 나왔다.  책 표지에는 ‘교사, 학부모 필독서’라는 문구가 있다. 반면, 인터넷에서 검색한 두 가지 버전의 영문판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부제가 붙어있다. ‘How we succeed in a world tha values sameness'(동일성을 중시하는 세계에서 우리가 성공하는 방법)와 ‘Unlocking our potential by embracing what makes us different’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 우리의 잠재력을 봉인 해제하기). 만약에 내가 이 책의 부제를 정한다면 ‘테일러즘은 어떻게 세상을 속여왔나’ 정도가 될 것 같다.

 

a world that values sameness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p 93)

존 D.록펠러가 기금을 대주어 설립된 이른바 일반교육위원회… 이 위원회가 1912년 테일러주의식의 자체적 학교 비전을 담아 발표한 논평의 일부 내용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나 이들의 자녀들을 철학자나 학자나 과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다. 우리는 작가, 연설자, 시인, 문인을 키우려는 것이 아니다.” (p 84)

테일러는 1906년 한 강연에서 …. “우리의 조직에서는 인간의 창의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창의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키는 대로 명령에 순종하고 시키면 바로바로 행동에 옮기는 태도입니다.” (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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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시대에 성공한 사나이

“We’re living in an era of fraud in America. Not just in banking. But in government, education, food, religion, journalism, prisons, baseball… Somehow, American values became fuck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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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he Big Short>에 등장하는 마크 바움의 대사다. Continue reading “사기의 시대에 성공한 사나이”